옷장 속의 바지들이 지겨워졌다면 디스트로이드 데님 진, 속칭 ‘찢청’에 도전할 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원단이 몇 수이고 어떤 시기에 제작된 데님이냐, 뭐 이렇게 구체적으로 고민하면 꽤나 복잡해지긴 합니다만 사실 디스트로이드 데님의 매력은 빈티지하면서도 내추럴한 무드 아닐까요? 확실히 지금의 디스트로이드 데님은 과거와는 느낌이 다릅니다. 90년대 그런지의 우울한 면을 걷어내고, 보다 깔끔하고 트렌디한 빈티지 스타일로 돌아왔어요.

Y2K 트렌드가 돌아온 이번 시즌, 마무리되지 않은 거친 미를 자랑하는 디스트로이드 데님을 하나 장만해서 현대판 코트 코베인이 되어 보는 건 누릴 수 있는 재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EGOZINE 동시대의 터치가 가미된 트렌디한 디스트로이드 데님 진을 세 가지 만나보려 합니다. 디스트로이드 특유의 냉소적인 반항과 자유스러움을 느껴보시길.

미국에 방문했을 때 디스트로이드 진을 입고 다니는 학생들을 보고, 한국의 대중은 언제쯤 그런지한 무드를 즐길 수 있을까 실없는 생각들을 한 적이 있어요. 담백하게 찢어진 예쁜 데님을 입고 회사에 출근할 수 있으면 시크하고 자유로운 이미지가 그 회사의 ‘멋’으로 스며들 수는 없을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

다행히 저희 팀원들은 편식 않고 입고 싶은 대로 입는 편인데요. 얼마 전엔 데님 마니아인 저에게 데님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주저 없이 이 데님을 보여줬습니다. 골반 쪽 매끄러운 쉐입, 무릎까지 좁아지다 밑단에서 웨스턴 느낌으로 낭창 펼쳐지는 구조적인 부츠컷 실루엣. 확신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곱씹을수록 훌륭한 핏을 가진 아이템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라고.

‘그런지’와 ‘하이엔드’는 마치 물과 기름.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키워드들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브랜드 R13의 옷들을 보고는, 그저 저의 퀘퀘묵은 관념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R13에서 내놓는 디스트로이드 데님은 ‘하이엔드 그런지’가 무엇인지 보여줘요.

특히 이 와이드 디스트로이드 진이 가진 무드는 절대 무난하지 않습니다. ‘정말 예쁜 핏이다’, 어디서든 자신 있게 내보일 수 있는 몇 안되는 진 중에 하나죠. 물론 R13만의 약간의 터치가 있었습니다. 거친 비대칭 디테일, 레이어드된 스커트, 곡선을 살려주는 섹시한 핏 등, 그런지 무드를 모던함으로 끌어올려 주는 장치들 말이죠. 이 정도면 깔끔한 재킷과도 여과 없이 잘 어우러지겠죠?

앞서 본 부츠컷, 와이드 디스트로이드 진도 멋지지만 이렇게 정석적으로 와이드한 진도 꽤나 유니크하군요. 자연스러운 워싱에 데미지 디테일, 흔치 않은 실루엣까지. 함께 입는 옷에 따라 다채로운 무드를 만드는 넉넉한 포용력을 자랑합니다.

감도 높은 여름 및 초가을 패션을 즐기고 싶을 땐, 사실 이런 디스트로이드 진만한 아이템이 없습니다. 제 색깔이 확고하면서 실루엣이 안정적인 진은 어떤 상의, 어떤 신발과 만나도 조화로운 구성을 만들어 주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