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었던 나의 일상은 돈을 버는 것을 기점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집순이에서 ‘여행가’로. 틈만 나면 항공편 특가 창을 들락거리고, 갑작스러운 휴일이 생기면 국내여행이라도 짬을 내서 다녀오고, 혹은 일하느라 바쁜 친구들 에게 여행 가자고 마음을 헤집어 놓기도 하고. 이런 패턴이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여분의 돈이 생기면 당장 끌리는 옷이나 소품에 지출을 마다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차곡차곡 모아뒀다가 여행 경비로 쓰다 보니 의도치 않게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자칭 여행가답게, 최소한의(?) 여행 필수품을 사는덴 돈을 아끼지 않는다. 가령 사이즈 별로 구매한 여행 캐리어랄까. 창고의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해가는 캐리어들 때문에 함께 지내는 룸메이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폭발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어떡해. 당장 제주도로 넘어가는 것과 마카오로 3박 4일 떠나는 여행의 크기와 무게는 다른 걸. 물론 ’디자인이 심플하고 예뻐서 세트로 사놓고 싶었다’라는 진짜 속마음은 절대 입 밖으로 뱉지 않았지만.

여행의 질을 결정하는 조건은 역시 의식주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고, 또 무엇을 입는가. 옷은 편한 게 장땡이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배경을 뒤로하고 후줄근하게 입는다면 은연중에 사진 찍기 싫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거든. 그래서 마음에 드는 패션 아이템 하나를 걸치고 도시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훨씬 꽉 차고 상냥하게 느껴진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에는 이런 버킷 햇만으로도 센치한 분위기를 챙길 수 있다. 그런지 무드의 패션이 유행인 요즘에 트렌디함을 챙길 수 있고, 인체공학적으로 얼굴이 작아 보이는 효과도 있다. 어찌 됐든 이 모자 덕분에 나는 느낌있는 여행가의 이미지를 챙기기도 했는데, 작년 가을에 방문했던 동유럽이 기억난다. 해안의 아름다운 도시, 그 바닷가에 알맞게 불던 바람의 조도와 방향, 그리고 버킷햇 아래로 포근하게 바스락거리던 머리카락. 다음에는 이 모자와 색감이 맞는 케이프를 걸치고 또 방문하겠다는 상상까지. 새삼 엉뚱하고 즐겁게.

여행할 땐 내 몸과 딱 맞붙는 가방 하나가 필수다. 중요한 물건을 여기 다 넣고 이 가방만 지킬 수만 있다면 무언가 잃어버려 곤란에 처하는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한다. 캐리어만큼 부담스럽지 않아서 언제 어디서나 가볍게 메기도 좋고 카드, 현금, 신분증, 휴대폰 정도만 넣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바로 꺼내 쓰면 되니까. 공간이 남는다면 친구 물건도 좀 넣어주면 더 좋고.

뿐만 아니라 이 푸른색 가방은 내가 하는 여행의 바람직한 환기 요인이 되어줬다. 나는 언제나 강한 푸르름이 좋았다. 그 활기와, 한층 상기된 색깔만이 가지는 건강한 에너지가. 이곳저곳 옷에 붙어도 톡, 튀는 비비드함은 옆에서 함께 여행 하는 사람에게도 그 활기를 전염시킨다. 나는 이 푸른 가방의 건강하고도 활기찬 존재감으로부터 여행 내내 영향을 받았다.

부주의한 사람이 게으르기도 하니 번번이 중요한 물건을 빼먹기도,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 정리 정돈이 안 돼서, 애써 사 놓은 여행 용품을 잘 관리할 줄도 모르고 망치는 일도 잦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내 친구는 답답함을 느꼈는지 직접 여행 파우치 세트를 선물해 줬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검은색 여행 파우치만 세 개로 늘어났는데, 그렇게 나는 속옷, 양말, 세면도구 등을 나누어 보관했을 때의 편리 함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막연히 그래야 할 것 같긴 했지만 언제나 나누어 담기란 내게 너무 귀찮은 일이었고… 아무튼. 캐리어 속에서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존재감 없이 잊히는 물건들은 이제 없을 것이다. 너저분하고 스산한 캐리어는 이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