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는 소소한 옷차림에서부터 시작되는데요. 특이나 요즘같이 갑자기 여름이 찾아왔을 때는 빠른 환기가 필수입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브랜드들의 컬렉션을 훑어보며 스타일을 살짝 바꾸기에 적절한 타이밍일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튀는 옷을 입어도, ‘여름이니까’ 라는 중얼거림으로 다 포용되는 느낌이거든요.

속속히 등장하는 패션 컬렉션들 중에서, 오늘EGOZINE에서 소개하는 브랜드는 R13입니다. 80,90년대 펑크와 그런지 스타일에 뿌리를 두고 탄생한 R13은 무질서하고 자유로운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개성을 드러내기 제일 좋은 계절인 여름에 패션으로 주의를 끌고자 하는 사람들이 기쁘게 맞이할 브랜드인데요. 실제로 반팔 티셔츠와 데님 맛집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착용하기 쉽고, 자주 손이 가는 동시에, 또 클래식한 미를 겸비하고 있는 아이템들이 그득한 이 브랜드. 주목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R13 속엔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실험적이고 담대한 컬렉션을 전개하는 ‘R13’. 디자이너 크리스 레바(Chris Leba)에 의해 2009년에 설립된 미국 브랜드입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아메리칸 펑크와 그런지 스타일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핏과 실루엣의 아이템을 선보이고 있어요. 중성적인 무드, 디스트로이드 디테일, 어두운 컬러와 거친 워싱이 특징.

독특한 브랜드에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R13에 디자이너 ‘크리스 레바(Chris Leba)’가 있던 것처럼요. 크리스 레바는 베트남 난민으로서 미국에 정착한 인물입니다. 펑크 문화가 지배적이던 80년대에 뉴욕으로 이주했어요. 

뉴욕 주 롱아일랜드 가장 동쪽에는 몬탁 해변(Montak)이 있는데, 크리스 레바는 어린 시절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이 해변 주변의 서핑숍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해변에서 모텔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지금의 R13엔 남서부 지역의 우상화, 스터드와 초커, 꽃무늬 셔츠 등의 디자인이 곳곳에 묻어나는 이유죠.

레바는 뉴욕의 패션 공과대학교를 졸업하고 J.Crew에서 첫 패션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타미 힐피거, 아메리칸 이글 아웃피터스를 거치고, 마지막으로 랄프로렌에서만 약 20년 동안 일을 했어요.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끼고자, 오랜 기간 일했던 랄프로렌을 떠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랄프로렌이라는 브랜드에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금 더 큰 시장(Mass market brand)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전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브랜드, R13을 2009년에 런칭했습니다. 미국 역사의 반항적인 정신을 되새기는 럭셔리 베이직을 보여주자는 취지였지요. 펑크 컬처가 모든 문화를 범람하던 시기, 80년대를 살아온 크리스 레바는 90년대로 넘어갈 때 파생된 그런지 스타일의 무절제한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그 기반으로 브랜드를 전개하게 됩니다. 대량생산의 아이콘과도 같은 ‘데님’ 브랜드로 첫발을 내디뎠어요.

훗날 '브랜드 이름이 왜 R13인가'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시 레바는 브랜드 네임을 정하기 위해서 미국 역사에서 가장 ‘기반’이 되어 주었던 것이 무엇일까 골똘히 고민했다는 데요. 그런 과정에서

‘조인 오어 다이(Join or Die.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 깃발을 우연히 접하게 되지요.

이 깃발은 미국 독립 전쟁 중 식민지 주민들의 자유를 향한 상징이었어요. 몸통이 잘린 방울뱀 조각은 13개의 미국 식민지를 나타내는데, 독립을 위해 연합을 구성했던 그들의 ‘신념’과 ‘자유’가 레바에게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의 브랜드 또한 오직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우리 모두의 표현의 자유와 사랑을 위해 뭉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결국 ‘R13’은 ‘13 rattles(13개의 방울)’에서 영감을 받아 네이밍 되었습니다.

미술, 패션, 음악의 경계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R13. 크리스 레바의 목표는 과거의 친숙한 것들을 가져와서 진정성과 고유성을 해치지 않은 채로 현대화시키는 것이라고 전하는데요. 그가 말하는 친숙한 것들은 모두 80년대와 90년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크리스 레바가 나고 자랐던 80년대는 펑크가 모든 문화로 범람하던 시기였지요.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가령 영감의 대부분은 80,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밴드들입니다.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이나 너바나(Nirvana), 그리고 그 시대 언저리의 모든 밴드들. 혹은 영화로 치면, 1980년작 ‘The hunter’입니다. 이 영화가 때론 R13이라는 브랜드 그 자체로 느껴질 정도라고 전했는데요. 그래서 당시 음악과 영화 씬에서 볼 수 있던 ‘청바지’, ‘찢어진 흰색 티셔츠’, ‘검은색 레더 바이커 재킷’, 그리고 ‘검은색 레이스업 전투화’가 R13을 정의하는 아이템이라고 소개되고 있어요.

크리스 레바는 2009년에 R13을 런칭했지만, 디자이너로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6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첫 방송에서 이렇게 전했어요. “펑크와 그런지는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 문화에 존재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닥터 마틴, 가죽 재킷, 그리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고요.

펑크와 락을 사랑하는 크리스 레바의 마음은 디자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풍성한 반다나, 찢어지고 더러워진 디스트로이드 데님, 화려한 그래픽, 거친 비대칭 디테일 등. 거기다 섬세한 메탈 장식과 어두운 컬러가 더해지면, R13만의 반항적이면서도 도회적인 미학이 완성되지요.

그러나 이 브랜드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거친 워싱과 디테일을 품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이유. 곡선을 살려주는 중성적인 핏, 레이어링과 스타일링을 통해 세련됨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제 색깔을 유지하면서 하이엔드스럽다는 것. 얼마나 잘 하는 브랜드인지 증명해주는 대목입니다.

데님 브랜드로서 첫 발을 내디뎠지만, 점차 이런 감성을 담은 다양한 데님과 셔츠, 가죽 재킷 위주의 제품을 제작해 왔지요. 그 행보가 워낙 독보적이고 뚜렷해서 런웨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지금도 R13은 카테고리를 조금씩 확장하는 듯한데요. 플란넬 셔츠, 니트, 나아가 슈즈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탄탄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크리스 레바는 그의 컬렉션을 하나의 ‘문장’이라고 말하는데요. 좋은 문장, 좋은 이야기를 위해서는 ‘많은 단어를 써야 한다(You need to use all the words)'고 전합니다. 그러나 R13은 사실 직설적인 단어만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어요. 가령 투박한 그래픽, 크고 헐렁한 옷 등.

물론 그것 또한 멋있지만, 다채로운 언어를 썼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FW 컬렉션에서는 전례 없는 도전적인 실루엣이 돋보였습니다. 다채로운 어휘로 풍성한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고나 할까요.

'고딕 문화'와 '마녀'에서 영감을 받은 이번 시즌. 마녀의 로브처럼 재킷과 셔츠의 뒷깃을 후드로 올리고 풍선과 같은 주름이 추가된 것이 특징입니다. 으스스하지만 이상하게도 멋스러워요. R13 또한 ‘구조적이면서 기괴한 멋’ 또한 즐길 수 있다 걸 증명한 이번 시즌, 그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몇 가지 룩이 있었는데요. 아래에서 함께 확인해 볼까요.

레이스넥의 슬림 니트탑과 미디스커트 레이어드 와이드진의 매력적인 믹스매치가 돋보이는 룩. 통상적으로 레이스는 페미닌 무드를 강조하는 원단이지만 이렇게 펑키하게 풀어내면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과감하게 레이어드된 초커, 네크리스들 그리고 스터드 플랫폼 부츠가 화려하고 유니크한 R13의 매력을 더욱 강조해 주는 즐거운 느낌.

“이 더플코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만으로 끝이다!”당당히 말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믹스매치가 유난히 돋보이는 이번 시즌에서, 과장되게 오버한 대디핏의 더플코트와 펑키한 스터드 부츠가 믹스매치되었어요. 그러나 더욱 재밌는 디테일은 코트를 여미는 단추가 빅사이즈 핀이라는 것. 더플코트라는 아이템을 이렇게 과장된 핏과 핀 디테일을 활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독보적인 아이디어입니다.

브랜드 R13의 옷들은 디자이너 크리스 레바가 살아온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쯤 되면 성공한 브랜드의 특징인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보고 느꼈던 것들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만들어 버리는 용기와 자신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무엇을 공부하겠다’보단, 과거에 했던 생각들과 감명받았던 요소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며 ‘이미 가진 것, 알고 있는 것들’에 스스로 집중하는 과정이 필요하겠다고요. 커다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어릴 적 좋아했던 만화, 인형, 영화, 음악을 천천히 써 내려가보시길. 이 사소한 노력이 모든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그리고 크리스 레바를 포함한 모든 패션 디자이너들을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 궁극적인 이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