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 몇 달동안 혼돈의 카오스였다는 미국 월스트리트. 월스트리트 저널에는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 헤드라인으로 가득 찼습니다. 글로벌 경제에서 영향력이 큰 미국이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음으로써 너도나도 글로벌 침체를 우려하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발렌시아가의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는 패션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패션쇼를 통해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일침을 가하기도 하는데, 이번 쇼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는 글로벌 경제 침체, 주식 시장의 결함이라는 그 어둠을 당당히 마주했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를 배경으로 라텍스 보디슈트를 얼굴까지 가린 모델들이 한 명 씩 등장했는데요. 마치 다른 차원의 ‘기업 사냥꾼’들 같았죠.

가짜 100달러 지폐가 가득 들어 있는 초대장을 받은 퍼렐 윌리엄스, 예(칸예 웨스트), 클로이 세비니 등 관객들은 흥분에 반짝이는 눈으로 쇼를 즐겼습니다. 트렌드를 증명하듯 첫 번째, 두 번째 룩으로 등장한 아워 글라스 실루엣 코트와 재킷. 모두 뎀나가 애정하는 오버사이즈(oversized)로, 직선으로 떨어지는 어깨와 아래로 부드럽게 들어가는 허리라인이 대비되는 형태였습니다. 1980년대 탄생한 아워 글라스 실루엣이 발렌시아가의 손을 거쳐 더욱더 과장된 파워숄더와 잘록한 허리선으로 세련되게 변모한 모습.

패션에서 ‘미니멀’이라는 용어를 확산시킨 브랜드가 있다면. ‘헬무트 랭’, ‘프라다’, ‘캘빈 클라인’ 등 브랜드가 많이 생각나겠지만, 확실한 것은 90년대 패션에선 ‘질 샌더’를 빼먹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질 샌더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외한 순수한 미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브랜드로서, ‘단순함’과 ‘간결함’을 가장 경제적으로 잘 표현하는 브랜드에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디자인. 질샌더의 부부 디자이너 ‘루크(Luke Meier)’와 ‘루시 마이어(Lucie Meier)’는 그들만의 특별한 시선으로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된 미니멀 세계를 구축한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질샌더의 올해 겨울 컬렉션은 타 브랜드처럼 화려한 장치도, 시끌벅적한 퍼포먼스도 없었지만 항상 그렇듯 따듯하고 안온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부드러운 파스텔 컬러와 우아한 아워 글라스 실루엣이 질샌더의 이번 시즌 시그니처 디자인이었습니다. 값비싼 울과 실크로만 디자인되어 있어 꾸뛰르 답게 고급스럽고도 예술적입니다.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델라쿠라의 생일이자, 행운의 숫자인 21을 네임으로 런칭한 귀여운 브랜드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하이엔드 컨템포러리 브랜드, Nº21(누메로 벤투노). Nº21은 남성 스포츠웨어에서 영감을 받은 디테일을 적용하여, 가장 현대적이면서 감각적인 패션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우아한 그래픽으로 러프한 로맨틱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어 국내에서도 끈끈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지요.

“항상 마네킹 작업을 하는 재단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오버사이즈 블레이저를 해체하는 것은 그들에게 일도 아니었다고. 블레이저의 허리를 조여 코르셋 모양으로 변형시켜 섹시하고 페미닌스러운 반전을 줬어요. 단단하지만 산뜻한 아워 글라스 코트, 볼드한 귀걸이, 시크한 스틸 토까지, Nº21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엔 무언의 아우라를 조성하는 간결한 스타일링도 한몫했을 겁니다.

코로나19로 집 밖을 나서는 일이 줄어들면서 원마일웨어(one mile wear)가 유행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패션계는 외칩니다. 더 이상의 편안함은 지겹다고. 뉴욕 패션 브랜드 프로엔자 슐러(Proenza Schouler) 또한 “운동화가 지겹다”며, 끝없는 나태함을 거부한 패션쇼를 선보였는데요. 무엇보다 다가올 미래에 충실하며, 꾸미는 재미을 높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쇼였어요. 

횡격막을 부드럽게 감싸고 옆으로 단추를 잠그는 독특한 아워 글라스 재킷. 몸통을 가로지르는 이런 재킷을 더할 나위 없이 시크하게 입고싶다면 이보다 효과적인 스타일링 참고서는 없을 겁니다. 재킷 안에 레이어드한 깔끔한 목 폴라, 보일 듯 말 듯 존재감을 발휘하는 백, 스트랩을 길게 늘어뜨린 유려한 슬랙스를 입은 심플한 모습. 머리에서 발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는 실루엣은 일상에서도 언뜻 참고하고 싶게 만듭니다. 에디터가 뽑은 가장 마음에 드는 룩은, 18세기 파니에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풍만한 드레스와 아워 글라스 재킷을 매치시켜 버린 것. 정말이지 현대판 마리 앙투아네트 못지않네요.

백화점 좀 다녀본 이라면 알지요. 이탈리아의 패션그룹, 막스마라(Max Mara). ‘편안하고 실용적인 패션’이라는 창립 당시의 브랜드 컨셉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여, 현재는 막스마라 막스앤코(Max&Co) 스포트막스(Sportmax) 등 7개 브랜드를 런칭하여 전 세계 95개국에 진출해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브랜드 ‘스포트막스(Sportmax)’의 컬렉션을 소개해 드립니다. 막스 마라의 여동생 브랜드라는 지위답게, 확실히 젊게 감각적인 느낌이 낭낭해요.

빅토리아 시대로부터 영감받은 퍼프소매, 러플 칼라, 멀티 레이어 요소가 가득 첨가된 이번 컬렉션. 그중에서 많은 팬들의 구매 욕구를 불태웠던 아이템은, 스트라이프 데님의 아워 슬라스 실루엣 드레스였습니다. 흐트러진 머리, 어깨 선이 도드라지는 드레스에 셋업 팬츠로 합을 맞춘 디자인은 베이비돌 인형처럼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묵직함을 잃지 않아서 어디 비할 데 없이 독보적이네요.

“검은색은 겸손하면서 거만하고, 게으르면서 편안하고, 동시에 신비로운 색이다.”

기가 막힌 브랜드 하나는 누군가의 취향이 되기도 하지만, 점차 하나의 패션 스타일 장르로 자리 잡기도 하며, 더 나아가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주는 좋은 레퍼런스가 되기도 합니다.

블랙 컬러를 활용하여 암울한 사회 현실에 대한 좌절과 반항을 표현하는 아방가르드 하이엔드 브랜드,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가 그런 것처럼요. 요지 야마모토의 옷들은, 뭐랄까요. 정해진 코드를 따르지 않고도 어떻게 하면 패션을 선도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품들 같아요.

요지 야마모토의 2023 SS 쇼에는 군중이 넘쳐났습니다. 근래 젊은 디자이너들이 요지 야마모토의 1990년대 작품을 재해석한 멋진 컬렉션을 발표하여 그 기대감을 가지고 방문한 이들이었어요. 혹은 올해 79세가 된 요지 야마모토와 그를 대신하여 활약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보고 그의 은퇴를 예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퇴나 승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대신 서양의 테일러링과 동양의 비정형적 패턴을 결합한 황홀한 디자인만이 넘실거렸지요.

정교하고 비스듬한 스트랩, 바로크 양식의 컷 아웃 디테일, 그리고 레이스 소재를 적극 활용한  아워 글라스 실루엣. 특히 세로로 긴 칼라와 좁은 허리, 종이접기 놀이처럼 구겨진 주름이 멋스러운 올 블랙 룩들은 쇼장에 방문한 숱한 이들이 넋을 놓고 바라본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패션쇼를 본 이들은 깨달았습니다. 시간은 흐르겠지만 야마모토의 우아함만은 영원하리라고.